소설가 김훈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대학원 수업을 가기 위해 서울역 플랫폼에 내려가는데
제 바로 옆에서, 눈빛이 형형한 노신사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단 한 번도 만나뵙지 못한 분이지만, 어쩐지 눈에 익었습니다.
저는 망설이다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소설가 김훈 선생님 아니세요?"

눈빛이 검광같은 그 초로의 신사는, 저를 한번 흘끗 보더니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으며
"네."
하며 자신의 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가셨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전 잠깐 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동경하는 대작가.
언젠가 한번쯤 뵈었으면 영광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분.
언젠가 강연회 같은 장소에서, 먼 발치에서라도 한번 보게 될 날이 있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저의 옆을, 그분은 그저 바쁘게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 대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형태의 만남에 저만이 굳어져 있었고 그 분은
늑대같은 눈빛으로 그 군중 속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분께 사인이나 악수를 청해야겠다는 생각은 감히 품을 수 없었고
단지 그분의 형형한, 검광같은 눈빛.
그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늑대같은 고고함 만이 제 몸을 벼락처럼 때렸고
그래서 전 한참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간신히 용기와 정신을 차리고, 멀어져 가는 그분의 등 뒤에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그 분은 짧게 절 돌아보며, 짧게 대답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전 그분의 뒷모습을 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흐릿한 이 사진 한장만이, 뭔가 제게 계시같은 잠깐의 만남을 증거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한가운데 찍힌 김훈 선생의 흐릿한 모습은, 지금도 제 망막에 찍혀져 인화되어 있습니다.



 

by L-50 | 2009/05/19 00:47 | 글공부와 창작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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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死海文書 at 2009/05/19 00:56
풀리셨군요.
Commented by 나별이 at 2009/05/19 03:13
무슨 일로 서울에 올라오셨을까요. 일산 작업실에서 출타하시기를 꺼리시는 분이신데.... 궁금하네요.... 문학동네는 파주 쪽에 있는데 말이죠. 저도 김훈 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담의 자리였는데 저는 그분이 풍기시는 아우라만 보고 있어도 감동에 젖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네요.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단편 소설 화장을 손으로 필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심난하던 차에 벨리에서 보고 들어왔습니다. L-50님도 김훈님만큼 재미있는 글 쓰시길 잠시나마 빌어봅니다.. ^^
Commented by momo at 2009/05/19 16:23
작품은 숭상하되 사람은 숭상하지 않아야 나중에 후회나 실망이 없습니다....그 작품이 소설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말입니다....
Commented by L-50 at 2009/05/19 20:14
네 저도 글쓰는 인간이라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작품과 작가는 별개이지요. 김훈선생 저 분도 조직생활간의 불화, 평소의 꼬장꼬장함과 타협없음 등으로 많은 이야기가 있는 분인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저 분의 고고함을 닮고 싶고 부러운것이 사실입니다. 저 분의 천성인 그 타협없는 꼬장꼬장함까지 닮지는 않더라도요. 저 분이 현재 있는 '위치' 가 부럽고 또한 동경하고 있다는 말씀이 더 맞겠네요.

무슨 말씀인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숭상하던 작가분에게서 크게 실망한 경험은 저 역시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 분을 존경하고 영웅시하되, 저 분의 내면까지 닮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Commented by 낭랑18세 at 2009/05/19 22:16
우연히 이 곳까지 들어오게 됐습니다.
저는 부산에 사는 여고생입니다.
바로 어제 , 저희 학교에서 주최하는 '저자와의 만남'이란 조그마한 교내 행사에
김훈 선생님께서 오셔서 만남을 가졌는데 아마 부산에 오기 위해 서울역에서 출발하시기 전의 모습인 듯 합니다. 사진 속 모습을 보니 김훈 선생님이 맞네요^^
정말....우연히 .... 그냥 한 글 자 적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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